'사이보그 그녀'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7.27 [pifan리포트]#1. 소년의 포르노 : “사이보그, 그녀” - 곽재용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이보그, 그녀 Korea/Japan : 2008 : 120min : 35mm : Color : 곽재용



 <엽기적인 그녀>를 극장에서 못 봤다. 처음 보게 된 것은 군 복무 중이었는데, 하도 열심히 봤더니 휴가 다녀온 후임이 비디오를 사다 줬다. 보고 또 봐서, 두 연인이 헤어지는 역이 '일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친소>도 극장에서 못 봤다. 중국 여행을 갔다가 DVD를 구하게 되었는데, PS2에 넣고 돌려 보니 어이없게도 중국어 더빙이 되어 있었다. 투덜거리며 비디오 대여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곽재용 감독의 '여친 시리즈' 중 세 번째 이야기, <사이보그, 그녀>를 극장에서 봤다. 극장에서 영화를 공감하고 공유하는 것의 묘미 중 하나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 누군가와 함께 온 이들의 영화에 대한 촌평을 엿듣는 일일 텐데, 이 영화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이거, <엽기적인 그녀>잖아!'였다. 미래에서 주인공 지로의 연인이 되어 주기 위해서 온 사이보그 '그녀'의 '엽기적'인 행동들은 2001년 여름, 뭇 남성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전지현의 모습에 다름아니다. 게다가 그녀를 지켜보는, '견우'를 꼭 닮은 주인공의 얼굴이며 행동거지를 보고 난다면 누구라도 <엽기적인 그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모태가 되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 헌사를 바친다. 이를테면 '대무(大霧)교통'이라는 업체명이 새겨진 버스를 타고 찾아간 지로의 고향을 내려다본 모습은 <엽기적인 그녀>의 연인들이 나무 아래 타임캡슐을 묻고 내려다보는 일양역 부근의 모습과 놀랄만치 흡사하다. 안개 속에 파묻힌 지로의 고향은 사실 지로의 과거인데, 영화에서 가장 서정적인 부분이다(예민의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가 BGM으로 깔린다).


 그럼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엽기적인 그녀>와 흡사한 꼴을 하게 되었을까? 답은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 앞에 선 곽재용 감독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엽기적인 그녀>와 전작인 <비 오는 날의 수채화>의 공백 기간이 길었다. 오랜만에 찍게 된 영화였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집어넣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전지현을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으로 설정했다. 전지현이 <엽기적인 그녀>에서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실제로 영화화하고 있다. 말하자면 '소나기'는 <클래식>이, '비천무림애가'는 <무림여대생>이 되었다.

 그렇다면 <사이보그, 그녀>는? 어렵지 않게 전지현이 미래 전사가 되어 감금되어 있는 차태현을 구해 내는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친 시리즈'의 세계 속에서 말하자면 <사이보그, 그녀>는 전지현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의 이야기로 보아, 전지현이 곽재용 감독의 분신이라고 할 때 조금 수상쩍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 의심은 바로 '감독은 아무래도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아닐까.'라는 것이다. 엽기적인 '그녀'는 결국 견우에게로 되돌아온다. <클래식>에서는 못다한 사랑을 다음 대에서라도 이루게 한다. 급기야 <사이보그, 그녀>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면 시간 여행을 통한 무한 복제로라도 사랑을 이루어지게 한다(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영화에서는 <에반게리온>의 레이의 미니어쳐가 소품으로 사용된다).


 다시 해답은 감독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감독의 말을 들어 보자.



 나의 시나라오에는 남자들의 환상이 들어 있으며, 시나리오를 쓸 때에는 소년 시절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이쯤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소년의 포르노이다.


 거듭 복제되는 '그녀'처럼 반복되는 '소년의 포르노'를 용납할 수 있는 있는 당신이라면 보아 나쁠 것 없는 영화이다(물론 아직 '소년'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우기고 있는 나로서는, 충분히(?) 용납할 수 있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