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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28 3. 러시아(06. 4. 12. ~ 4. 23.) #3 시베리에 횡단열차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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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


4월 13일 목요일

 여덟 시 반쯤 기상. 아홉시에 빵과 차로 아침식사. 아무도 깨어있는 사람이 없다. 천천히 씻고 나갈 준비를 한 뒤, 열한 시 반쯤 밖으로. 열두 시 전에 체크아웃을 하려고 했는데, 가방 정도는 그대로 둬도 된다고 한다. 지도를 보며 일단 광장으로. 거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걸어다닌다.

 걷다 보니 앙가라 강변에 도착. 광장 뒤편인에서는 마침 2차대전 당시의 이르쿠츠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의 초병 교대의식이 진행중이다. 다리를 높이 올려 걷는 딱딱한 동작으로 교대하는 군인들 주위를 러시아인들이 놀리듯 경례를 하며 따라 걷는다. 정위치하여 부동자세로 서 있는 군인을 폰카로 찍으며 웃는 러시아 여성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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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불꽃'의 초병


 허기가 느껴져서, 트램 1번을 타고 중앙시장으로 가서 구경한 뒤 빵과 네스티(50p)로 요기. 무엇을 사야 할까(기차 안에서 먹을 것) 대충 눈으로 보아둔 뒤, 중심가쪽으로. 중심가쯤 가니까,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유를 얼핏 알 듯도 하다. 추위를 피해 백화점 구경 후, 중국시장에 가서 어제 발견한 좌판 아주머니의 밥을 사 먹는다. 아주머니는 단속을 피해 골목 안으로 들어가 계신다. 중국인 시장은 여기가 러시아인지 중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중국인이 많다. 다시 백화점으로 가서 현금인출기에서 2000루블 출금. 중앙시장으로 가서 기차 안에서 먹을 것들을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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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 중심가의 레닌 흉상


 다섯 시쯤 숙소에 도착. 주인 아주머니와 짧은 영어로 대화하다가 다섯 시 40분에 역으로. 15번 칸의 12번 침대를 차장아주머니가 배정해준다. 내가 산 차표는 3등 침대칸으로, 한 량이 모두 개방되어 있는 열차다. 여행자라고는 나밖에 없다(여행자들의 경우, 보통은 2등 침대칸-4인 1실-을 탄다고 한다. 하지만 3등 침대칸의 가격은 2등 침대칸의 절반). 세르게이라는 이름의 할아버지(라기엔 그리 나이들어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손자와 있으니. 우리 아버지뻘 정도)와 안나라는 이름의 아이 엄마(28세), 바샤(바부쉬카, '성 바실리'의 이름을 딴 것. 6세)라는 아이와 같이 지내게 됨. 적어 둔 러시아어로 인사하고, 사탕 하나를 바샤에게 쥐어준 뒤 금세 친해진다. 이 가족도 모스끄바까지 간다고. 기차 안의 시계는 모스끄바에 맞춰져서 -5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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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할아버지와. 뒤쪽에 '군복 녀석들'도 보인다. 촬영은 바샤가.


 바샤의 그림책으로 러시아어 읽기를 연습하자니, 상의를 입지 않은 군복 차림의 녀석들이 말을 걸어온다. 그중에 이가 담뱃진으로 누런 녀석 하나가 옆에 붙어앉아 발음을 교정(?)해준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열차칸 사이로 나갔다가, 술에 잔뜩 취한 군복 녀석들 중 하나에게 붙들려 엄청 시달림. 자기들이 가진 통조림을 꺼내보이며 이걸 사서 같이 보드카를 마시자는 모양이다. 아껴두었던 소주 한 병을 먹여 달래보려 했으나, 허사. '내일'을 러시아어로 말하며 겨우 잠자리에 든다.

(시트 커버 요금 45p)



4월 14일 금요일

 모스끄바 시간 다섯 시쯤 기상(이후 모두 모스끄바 시간). 다섯 시간 시차만큼의 거리를 기차로 이동하는 것이다. 어제 사둔 사과와 라면으로 아침식사. 기차는 예니세이강을 건너 '크라스노야르스크' 역에 도착. 30분 가량 서 있다. 기차가 정차해 있는 동안 역 주위의 노파들이 집에서 만들어 온 음식들을 판다. 맥주 한 병과 닭다리 하나, 오이절임을 산다(100p). 그것과 빵, 살라미 소시지, 치즈, 홍차로 점심. 기차 양 끝의 사모바르에서 뜨거운 물을 쓸 수 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한국에서 가져온 책 "귀여운 여인"(안톤 체홉)을 읽다보니 금세 바샤네 가족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한다. 빵, 소시지, 오렌지 쥬스로 요기. 바샤네 가족에 대한 상세 정보. 세르게이는 집 짓는 일을 한다는 모양. 안나는 미용쪽 일. 벨라루시에 계신 안나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며, 집은 chita라고. 식사를 마친 뒤, 기차가 이름모를 역에 도착한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걸로 보아 조금 덜 추운 곳으로 접어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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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라이35를 들고 있는 바샤. 작은 크기 때문인지,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울란바타르에서 이르쿠츠크로 이동할 때 탔던 2등 침대칸보다 3등 침대칸쪽이 훨씬 재미있다. 무엇보다. 자리가 좋게 배정되었다. 허름한 차림의 남자에게는 화장실 가까운 자리를 주더라. 아직까지 지루하지는 않지만, 하루가 조금은 단조로워졌음을 느낀다. 일기도 자연 짧아질 밖에.

 

4월 14일 토요일

 아침은 역시 사과와 라면. 점심은 바샤네가 준 러시아제 라면. 쌀이 먹고 싶다!(러시아제 라면 봉지가 쌀로 만든 면이라는 의미의 그림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정차역에서 50p짜리 튀긴 빵을 사 먹음. 안에 사과쯤으로 생각되는 잼이 들어 있어 맛있다. 기차에 오르기 전에 미리 사두었던 먹을 것들이 거의 동이나 이젠 사 먹을 수밖에 없다. 멍하니 봉지를 들고 있다가 개에게 먹을 것을 빼앗길 뻔한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모여 하루가 된다.

 낮잠을 잔 뒤, 햄버그와 빵, 토마토 두 개, 삶은 계란 하나와 파 한 뿌리가 든 도시락(50p)을 사 먹는다. 금방 만들어 온 것이라 따끈따끈하다. 일단은 라면이 아니라서 좋다. 창 밖에는 눈이 쌓여있지 않은 곳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어제 눈이 오지 않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점점 따듯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키 큰 나무들은 여전하고, 군복 녀석들도 술 마시자고 계속 채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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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와 안나. 침대와 침대 사이에 간이 탁자가 놓여 있다.


 모레 새벽이면 모스끄바에 도착이다. 바샤 가족과 미리 주소를 교환한다. 내일은 사진을 찍어둬야겠다. 바샤가 하루종일 치대서 땀이 날 지경이다. 샤워가 하고 싶다. 여름에 블라디보스톡에서부터 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정말 고역일 게다. 창 밖으로 기가막힌 풍경들이 지나갈 때마다 사진을 찍을 수 없음이 아쉽다. '운전면허를 따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드는 몇 안되는 경우 중 하나.

 오늘은 바샤가 세르게이 할아버지께 혼나고 우는 것을 보았는데, 베개로 머리를 감싼 채 소리죽여 울더라. 여섯 살짜리 답잖은 행동이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안나에게 귓속말을 하는 모습은, 그 전에 큰소리로 "오줌 마려워!"라고 했다가 혼나는 바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재미있다.



4월 16일 일요일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우즈베키스탄 아저씨를 만나다. 이름은 압둘라. 이슬람 교도이고 평택, 수원, 금산에서 일을 하셨다고. 비자가 만기되어 쫓겨나신 모양이다. 다행히 한국에 대한 나쁜 기억은 없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 마음씨가 좋다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아저씨. 술과 담배는 하지 않지만 여자는 밝힌다며, 아내를 넷까지 들일 수 있는 이슬람교 탓을 한다. 우즈베키스탄 여자들은 이슬람교도인 탓에 집안 일만 해서, 돈을 벌기가 힘들다고 한다. 모스끄바에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길이라고. 상페테르부르크에는 못된 놈들이 많다며 조심하라는 당부말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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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노동 경력이 있어서 한국어를 구사하시던 압둘라 아저씨.


 모스끄바 역 전에 '황금의 고리'라 불리는 곳에 정차한다는 사실을 알고 도중에 내리려 했으나, 압둘라 아저씨의 통역에 따르면 바샤 가족은 모스끄바에서 내려 벨라루시에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열 시간 동안 나와 함께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결국은 모스끄바에서 함께 내리기로 결심. 무슨 일이 생기면 벨라루시로 전화하라는 든든한 안나의 말. 여자는 확실히 애를 낳은 뒤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이 된다. 영어를 구사하는 러시아 학생도 중간에 승차했지만, 압둘라 아저씨를 만난 탓에 전혀 관심 밖이다.

 기차는 작은 역도 빠뜨리지 않고 정차한다. 이거야 원, 통일호를 타고 서울-부산을 며칠간 왕복하는 기분 아닌가. 오늘은 비가 내린다. 창 밖은 어느 새 완연한 봄이다.

(오늘 지출 내역 : 고기가 든 튀긴 빵 50p, 닭다리 도시락 50p. 닭다리 도시락은 약간 상한 느낌도 들고, 잘 익지도 않은 엉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