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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라 키세스 에브리바디 (Viola Kisses Everybody, Viola Bacia Tutti, 1998) 이탈리아 93 분




 HD TV가 안방을 점령해가고 있는 시대에, 아직도 마흔네 명의 축구선수가 공 두개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것을 봐야 하는 사람도 있다. 까짓 축구중계쯤이야 안 보면 그만이라고 하더라도, 영화를 볼 때면 고물 TV 소유자의 비애감(?)은 더욱 커진다. 화면의 이쪽저쪽에서 움직이는 고스트 사이에서 배우들의 움직임을 알아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도 일요일 밤, '출근하기 싫어!'라며 무거운 눈꺼풀을 부릅뜨고 리모콘을 꾹꾹 누르다 보면 내일의 쾌적한 근무를 위한 수면을 두고 고민을 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 있으니, 바로 SBS의 시네클럽이다. 새벽 한 시부터 영화를 시작해서 두 시간 안팎의 영화가 끝나고 나면 새벽 세 시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이 시간에 '이거 재미있겠는데'라는 느낌의 영화가 상영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젯밤에도 붙들려버렸다.

 '비올라 키스 에브리바디'는 세 남자와 한 여자의 로드무비이다. 캠핑카를 타고 이탈리아의 오지를 여행하는 사무엘과 맥스, 니콜라는 미모의 도둑 비올라의 동조자가 된다. 그녀가 훔친 '천문학적 가치'의 동전으로 인해 닥치게 된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지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캠핑카를 타고 누드 비치와 농장을 누비던 그들은 거래처를 찾아내어 스위스 국경을 넘게 된다. 하지만 국경에서의 검문에 겁을 먹은 비올라가 동전을 돼지들이 실린 화물칸에 던져버린 탓에 일확천금의 꿈은 날아가버린다. 서로를 나무라던 와중에 비올라가 왜 자신을 따라다녔느냐고 묻는다. 니콜라는 대답한다.

 "우리남자니까."

 그들은 스위스의 풀밭에 돼지들을 풀어주고 비올라는 제목대로 '모두에게 키스'를 한다. 비올라가 그들의 '여자친구'가 되는 순간이다. 동쪽의 해안에서 일출을 보고, 서쪽 해안에서 일몰을 기다리던 그들은 비올라와 작별한다. 비올라는 '여자친구'와 작별을 하면서 선물도 주지 않느냐며 그들의 셔츠를 빼앗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짧은  치마를 입고 떠나는 비올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들은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그런데 캠핑카 안의 화장실에 낙서가 되어있다(고물 TV덕에, 뭐라고 씌어있나 보기 위해 눈을 잔뜩 찌뿌려야 했다).

 '행성은 절대 자신의 위성을 버리지 않는다.   -비올라-'

 비올라는 그들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캠핑카 지붕에 납작 엎드린 비올라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브라운관 너머의 우리들 모두에게 키스를 보낸다. 그리고 영화는 끝.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비올라를 좋아하게 된 세 남자를 '그들'로 묶어도 무방할 정도로 비올라와의 관계에서 우열이 없다는 점이다. 만약 여자들 사이에 남자 하나가 끼어있었다면 이야기는 결코 재미있지 않았을 거다(만약 그런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남자는 바보여야 마땅하다).
 화면 가득한 햇살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로드무비.



 대저 사건이라는 것은 마땅히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제목에 ‘사건’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이야기를 대할 때, 사람들은 그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길 기대하게 마련이다. “마츠가네 난사사건”의 감독은 이 점을 잘 활용하고 있다.

 관객들이 ‘사건’이 시작되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동안 ‘난사’의 유력한 후보인 코타루를 미치게 만드는 온갖 일들이 일어난다. 아버지는 다른 살림을 차리고, 동생은 어딘가 수상쩍은 사람들과 무언가 수상한 일을 하고, 애인 부모님과의 상견례는 잘 되지 않고, 경찰서 천장의 쥐들은 잡히지 않고. 결국 그는 ‘근원차단’하기 위해 독극물을 들고 상수원 관리국을 찾아가지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상황은 이제 충분하다. 코타루는 마침내 미쳐버린 듯하다. 그런데 “이제 출동이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 영화는 관객의 뒤통수를 치며 끝나버린다. 고작 “이제 괜찮습니다”라는 대사로.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에서 영화가 끝나버리는데, 전혀 허무하다거나 화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의 재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기분이 된다.

 어쨌거나, 영화에서 ‘난사’는 결국 이루어진다. 그것이 당신이 기대한 방식이든, 그렇지 않든. 자, 이제 당신의 눈으로 난사의 현장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부천으로 서둘러 달려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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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가네 난사사건 Japan : 2007 : 112min : 35mm : Color




 치열한 예매경쟁을 뚫지 못하고 별 생각이 없었던 영화를 보게 될 경우가 있다. 사전 정보도 없이 보기 시작한 영화가 뜻밖으로 마음에 들 때의 쾌감은 대단하다. 길을 걷다 오천 원짜리 지폐를 주었을 때의 기분 정도?(왜 오천 원인지는 비~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영화는 보통 훌륭하지 않을 경우가 많다.

 묶어놓은 기준을 짐작할 수 없는 단편들의 묶음 “부천 초이스 : 단편 2”의 경우는 어느 쪽이었느냐 하면, ‘대체로 나쁘지 않다’ 정도. 하나하나 간단히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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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외로운 별> Korea : 2006 : 10min : Digi-beta : Color : 한병아
 엔딩 크래딧이 애니메이션 자체보다 볼 가치가 있다. 감독은 그냥 한 번 애니매이션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엔딩 크레딧엔 감독의 이름이 가득하다. 많은 이를 혹하려면 차라리 싸구려 아포리즘이라도 채워 넣었으면 됐을 텐데, 그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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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드워드 제임스의 기억> Canada : 2006 : 15min : Beta : Color : 로드리고 구디뇨
 최면 치료를 받는 남자의 시각을 카메라로 대체하여 기억을 추적하는 영화. 시작하고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결말을 알 수 있는 단편이다. 그 단점을 감춰보려는 의도였을까, 마지막에는 ‘그게 아냐!’라는 식의 꼬리를 붙이는 비겁함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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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매듭> Italy : 2006 : 33min : Beta : Color : 파비오 레시나로 & 파비오 구아글리오네
 과학이 신체에서 영혼의 물리적 근거를 발견한 근미래. 인류는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게 된다, 라는 전제로 시작하는 영화. 세계관이 마음에 들뿐더러, 영상과 음악도 빼어나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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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탈 느와르> France : 2006 : 15min : Beta : Color : 프랑수아 쟈맹
 단편답게 간결한 사건을 가지고 ‘르와르’ 장르를 패러디한다. 여자의 목을 삽으로 찍어 죽이는 장면에서는 의외로 공포에 질렸달까, 그런 반응의 관객들이 많았다. “오랫동안 친구가 되겠군”(이었던가?)이라는 마지막 대사에서는 이 영화의 성격을 확실히 이해하고 키득키득 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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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터와 로봇아빠> Spain : 2006 : 9min : Beta : B&W : 카를로스 탈라망카
 흑백필름. 예스러운 조명. 문장으로 치자면 의고체의 영화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이런저런 부품들을 모아 로봇 아빠를 만든다. 로봇이 완성되어 기침하듯 연기를 뱉어내며 아들과 걷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여객기가 무언가를 조롱하듯 날아간다. 은근히 웃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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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헬리 India : 2005 : 140mim : 35mm : Color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비가 내린다.


 설화는 역사적으로는 '전승'되며 지역적으로는 '전파'된다.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설화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더 널리 퍼지게 된다. 한편 이야기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기원하기 때문에 어떤 화소들은 여러 곳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에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여전히 이야기되고 있다.

 인도영화 "파헬리"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옹고집전에 지귀설화를 섞어놓은 정도의 영화이다. 나무의 정령이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집을 비운 그녀의 남편 형상을 하고 그녀와 사랑을 하게 된다는 간단한 뼈대의 이야기를 두 시간 20분으로 늘여놓았다. 인도영화이니만큼 흥겨운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않고 삽입되어 지루하다는 느낌은 없다.

 재미있는 것은 해설자 역할을 하는 꼭두각시 인형들이다. 왕과 왕비의 모습을 한 인형들은 판소리의 고수처럼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고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하며, 현자와 같은 충고를 하기도 한다. 조금 허술한 점은, 처음엔 이야기의 내부에 있던 인형들이 나중에는 이야기의 외부에서 논평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어쨌든 꼭두각시 인형들 덕에 영화는 민담의 특성을 획득한다. 할머니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흥미 본위의 옛날 이야기 같은 느낌 말이다.
 
 영화는 조금 황당하게 끝을 맺는데 골치 아픈 것은 잊어버리고, 민담을 듣는 것처럼 즐기고 마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영화에서 결말의 윤리성을 따지는 것은 성경을 읽으며 "에이, 말도 안돼"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 일단 표를 손에 넣었다면, 그들의 춤과 노래를 마음껏 즐겨라. 단, 옆 사람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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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속으로 Korea : 2007 : 104m : 35mm : Color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이야기를 ‘믿을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판타지에서 이 원칙은 더욱 중요하다. 듣는 내내 ‘이건 좀 비현실적인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이야기는 판타지로서 실격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판타지 호러 멜로’(?)를 표방하고 있는 황규덕 감독의 영화 “별빛 속으로”는 판타지물로서의 미덕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머릿속에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을 설정해보라. 그 선을 나비가 넘나들고, 선은 무화된다. “이 영화는 판타지이다”라는 선언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죽음과 삶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40대 교수인 수영은 꿈속에서 뛰쳐나온 듯한 나비에 이끌려 들어간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배경은 70년대 말. 수영의 첫사랑이랄 수 있는 ‘삐삐소녀(김민선 분)’의 투신자살 이후 그를 둘러싼 판타지가 시작된다. 암울한 시대상이 어쩌니 하며 이 영화를 설명하는 호사가들의 말은 믿지 말라. 이 영화의 시대배경은 신비의 인물 ‘삐삐소녀’와 주인공 수영을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될 뿐이다. “별빛 속으로”가 목적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어떤 이미지로부터 그 시대를 구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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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게'를 부르며 전단을 뿌리던 삐삐소녀는 투신자살을 한다.


 불만인 것은 목덜미가 후끈 달아오를 정도의 민망한 반전이다. 계획된 반전이긴 하지만, 그 앞까지의 이야기가 반전을 향해 달려왔다기보다는 반전을 엉성하게 덧붙인 느낌이다. 반전에 대한 강박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가 ‘판타지 멜로’물이라는 정보쯤은 미리 알고 있었으니만큼, 기대했던 것은 서사의 개연성이 아니다. 다만 좀 더 그럴싸하게 ‘뻥을 치는’ 솜씨가 아쉬웠다. 거짓말이 너무 투박하여 마치 조밥을 먹는 것처럼 껄끄럽다. 판타지 몇 편을 더 찍고 싶다는 감독의 다음 작품은 ‘목 넘김이 부드러운’(?) 영화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