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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 샨티 옴 India : 2007 : 169min : 35mm : Color :


 "누구도 신이 보호하는 생명의 촛불을 끌 수는 없다."라는 비장한 선언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다. 일 년만에 다시 만난 샤루 칸의 연기는 여전히 능청맞아서 즐거웠고, 디피카 파두콘의 아름다움에 부끄러움도 잊은 채 환호했다.

 여느 발리우드 영화와 마찬가지로, <옴 샨티 옴>의 미덕은 이야기 자체에 있지 않다. 전생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주인공이 환생하여, 자신의 사랑을 방해한 인물에게 복수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169분이나 되는 러닝타임의 추동력이 되는 대사는 단 하나다.

 여러분이 행복하지 않으면, 영화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옴 샨티 옴>은 관객들의 즐거움에 충실히 복무한다. 잘 짜여진 음악과 춤이 엉성한 이야기에 힘을 실어준다. 관객은 영화의 힘에 휩쓸려 논리적인 판단을 할 틈조차 없다. 줄거리를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느라 이마에 잡혔던 주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새 영화 속의 인물들처럼 흥겨워하고 즐거워하게 된다.

 카니발과 같은 열기 속에서, 바야흐로 관객은 신화적인 시간에 동참하게 된다. 신과 인간이 교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옛사람들처럼, 우리는 <옴 샨티 옴>의 세계를 전적으로 믿고 공감하기 시작한다. 인도인들의 원대한(?) 세계관이, 우리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는 찰나이다.

 <옴 샨티 옴>이 주는 쾌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비로소 영화의 주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채 가시지 않은 흥분과 축제의 끝이 안겨주는 아쉬움을 지닌 채 상영관 밖으로 나온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이내 뿔뿔히 흩어진다. 

 이것이 <옴 샨티 옴>을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다. 축제는, 함께 즐겨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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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피카 파두 월페이퍼. 팬클럽은 여기(http://www.deepika-paduko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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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 그녀 Korea/Japan : 2008 : 120min : 35mm : Color : 곽재용&#13;&#10;&#13;&#10;

 <엽기적인 그녀>를 극장에서 못 봤다. 처음 보게 된 것은 군 복무 중이었는데, 하도 열심히 봤더니 휴가 다녀온 후임이 비디오를 사다 줬다. 보고 또 봐서, 두 연인이 헤어지는 역이 '일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친소>도 극장에서 못 봤다. 중국 여행을 갔다가 DVD를 구하게 되었는데, PS2에 넣고 돌려 보니 어이없게도 중국어 더빙이 되어 있었다. 투덜거리며 비디오 대여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곽재용 감독의 '여친 시리즈' 중 세 번째 이야기, <사이보그, 그녀>를 극장에서 봤다. 극장에서 영화를 공감하고 공유하는 것의 묘미 중 하나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 누군가와 함께 온 이들의 영화에 대한 촌평을 엿듣는 일일 텐데, 이 영화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이거, <엽기적인 그녀>잖아!'였다. 미래에서 주인공 지로의 연인이 되어 주기 위해서 온 사이보그 '그녀'의 '엽기적'인 행동들은 2001년 여름, 뭇 남성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전지현의 모습에 다름아니다. 게다가 그녀를 지켜보는, '견우'를 꼭 닮은 주인공의 얼굴이며 행동거지를 보고 난다면 누구라도 <엽기적인 그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모태가 되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 헌사를 바친다. 이를테면 '대무(大霧)교통'이라는 업체명이 새겨진 버스를 타고 찾아간 지로의 고향을 내려다본 모습은 <엽기적인 그녀>의 연인들이 나무 아래 타임캡슐을 묻고 내려다보는 일양역 부근의 모습과 놀랄만치 흡사하다. 안개 속에 파묻힌 지로의 고향은 사실 지로의 과거인데, 영화에서 가장 서정적인 부분이다(예민의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가 BGM으로 깔린다).


 그럼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엽기적인 그녀>와 흡사한 꼴을 하게 되었을까? 답은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 앞에 선 곽재용 감독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엽기적인 그녀>와 전작인 <비 오는 날의 수채화>의 공백 기간이 길었다. 오랜만에 찍게 된 영화였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집어넣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전지현을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으로 설정했다. 전지현이 <엽기적인 그녀>에서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실제로 영화화하고 있다. 말하자면 '소나기'는 <클래식>이, '비천무림애가'는 <무림여대생>이 되었다.

 그렇다면 <사이보그, 그녀>는? 어렵지 않게 전지현이 미래 전사가 되어 감금되어 있는 차태현을 구해 내는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친 시리즈'의 세계 속에서 말하자면 <사이보그, 그녀>는 전지현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의 이야기로 보아, 전지현이 곽재용 감독의 분신이라고 할 때 조금 수상쩍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 의심은 바로 '감독은 아무래도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아닐까.'라는 것이다. 엽기적인 '그녀'는 결국 견우에게로 되돌아온다. <클래식>에서는 못다한 사랑을 다음 대에서라도 이루게 한다. 급기야 <사이보그, 그녀>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면 시간 여행을 통한 무한 복제로라도 사랑을 이루어지게 한다(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영화에서는 <에반게리온>의 레이의 미니어쳐가 소품으로 사용된다).


 다시 해답은 감독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감독의 말을 들어 보자.



 나의 시나라오에는 남자들의 환상이 들어 있으며, 시나리오를 쓸 때에는 소년 시절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이쯤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소년의 포르노이다.


 거듭 복제되는 '그녀'처럼 반복되는 '소년의 포르노'를 용납할 수 있는 있는 당신이라면 보아 나쁠 것 없는 영화이다(물론 아직 '소년'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우기고 있는 나로서는, 충분히(?) 용납할 수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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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 Japan : 2006 : 116min : 35mm : Color : 구수연


 깻잎장아찌를 기막히게 잘 만들던 어머니는 기침 몇 번에 돌아가셨어요. 고아가 된 형제는 서로 떨어져 자라게 되었지요. 형은 서태지를 닮은 청년이 되어 TV 요리 대결 프로그램에서 일찌감치 유명인이 되었고, 동생은 강타를 닮은 청년이 되어 곱창 요리의 대가 '한노인'의 조련 하에 그저그런(하지만 깻잎 장아찌만은 기가 막히게 잘 만드는) 요리사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소고기를 요리하는 형제의 만남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형은 자신의 영업에 방해가 되는 동생의 가게에 해꼬지를 하러 쳐들어가죠. 그게 동생의 가게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예요. 그런데 때마침 한노인이 '생애 최고의 곱창구이'를 만들고 돌아가셨습니다. 동생은 분노합니다. 자신에게는 이수만 씨와도 같은 한노인이 돌아가셨으니까요. 결국 그는 서태지 청년과 요리대결을 하게 됩니다. 그가 형인 줄은 까맣게 모른 채로요.

 요리대결에서 서태지 청년의 깻잎장아찌를 먹은 동생은 그가 자신의 형임을 눈치챘어요. 형이 요리대결에서 일부로 져주었다는 것도요. 물론 '귀'로 곱창을 구우라는 한노인의 조언도 승리에 한 몫 했지만요. 하필이면 대결 중에 그 뜻을 깨달았지 뭐예요(얄궂어라~). 어쨌든, 동생은 형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형은 이미 세트장을 빠져나간 뒤였죠.

 얼마 뒤, 동생이 형을 찾은 것은 강변의 허름한 불고기 노점에서였어요. 마침내 재회한 형제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곤 한바탕 웃어버렸죠.

 어때요, 만화 같은 이야기죠? 그러니 상관 없어요. 이야기가 곁가지를 뻗어 프레임 밖으로 나가버리든, 의미없는 미쟝센이 삽입되든, 편집이 두서없이 끊겨버리든. 어차피 웃어버리고 말면 그만 아녜요? 마지막 장면에서의 형과 동생처럼요.

 아, 썰렁했다구요?

 "그렇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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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공주 USA : 2007 : 96min : Digi-beta :Color : 데이비드 카플란


 영문 제목은 "Year of the fish", 한문 제목은 "魚年". 그런데 한글 제목은 "물고기공주". 왜일까?

 "물고기공주"는 실사 촬영 뒤에 디지털 페인팅 효과(포토샵의 'artistic' 필터를 적용한 것과 비슷하다)를 입혀 만든 영화다. 작업의 편의를 위해서인지 혹은 의도한 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초당 프레임을 줄여놓아서 눈이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이런 효과 덕이랄까, 이야기를 판타스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인물들의 분장이 더욱 그로테스크해 보인다.

 예 시안은 미국의 차이나타운에 팔리다시피 와서 안마시술소에서 일하게 된다. 그녀는 남성을 상대하기 싫어 구박을 받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그녀가 살아갈 낙을 얻는 것은 중국인 사이에 '믿거나말거나' 식으로 구전되는 인물인 '점쟁이 할멈'에게서 받은 물고기 한 마리와 첫눈에 반해버린 거리의 악사 조니 뿐이다. 그런데 물고기가 죽어버린다. 또다른 예언자적 인물인 '영감'의 조언에 따라 예 시안은 물고기의 뼈를 수습해 점쟁이 할멈을 찾아간다. 점쟁이 할멈은 마술같은 솜씨로 옷을 지어 예 시안을 변신시킨 뒤 신년 축제에 가도록 한다. 그곳에서 꿈에도 그리던 조니를 만난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듯이) 운명은 너무나도 가혹하야, 그들의 만남은 너무도 짧다. 이번에는 조니가 예 시안을 찾아나설 차례다. 안마시술소 단골인 친구의 도움으로 그 둘은 결국 다시 만난다. 조니는 보무도 당당하게(?) 예 시안을 안마시술소에서 구출해낸다. 그리고 그 둘은 행복하게 산다,

 라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이제 당신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영화의 한글 제목이 "물고기공주"가 되어버린 이유를 알 것이다. 이야기의 뼈대가 '신데렐라'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신데렐라' 이전에 그와 흡사한 이야기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의 '섭한(葉限) 이야기'이다. '葉限'의 중국식 발음이 바로 예 시안. 감독이 밝혔듯 이 영화는 중국의 민담에 근원을 두고 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민담에서 물고기가 하던 역할을 영화에서는 '점쟁이 할멈'이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물고기는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닌 이야기의 화자(그것도 영화의 처음과 끝에만 드러나는)로 전락하게 된다. 대신 영화가 얻은 것은 점쟁이 할멈이라는 환상적 인물이다.

 물고기 따위(?)가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한 조력자를 얻은 현대의 예 시안이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 사랑에 대한 대단치 않은 환상을 가진 그대라면 공감할 수 있을지도.





+) 08.10.06. 감독은 아마도 인류학자인 모양으로, "인류학의 문화이론"이라는 책을 냈다.


 대저 사건이라는 것은 마땅히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제목에 ‘사건’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이야기를 대할 때, 사람들은 그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길 기대하게 마련이다. “마츠가네 난사사건”의 감독은 이 점을 잘 활용하고 있다.

 관객들이 ‘사건’이 시작되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동안 ‘난사’의 유력한 후보인 코타루를 미치게 만드는 온갖 일들이 일어난다. 아버지는 다른 살림을 차리고, 동생은 어딘가 수상쩍은 사람들과 무언가 수상한 일을 하고, 애인 부모님과의 상견례는 잘 되지 않고, 경찰서 천장의 쥐들은 잡히지 않고. 결국 그는 ‘근원차단’하기 위해 독극물을 들고 상수원 관리국을 찾아가지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상황은 이제 충분하다. 코타루는 마침내 미쳐버린 듯하다. 그런데 “이제 출동이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 영화는 관객의 뒤통수를 치며 끝나버린다. 고작 “이제 괜찮습니다”라는 대사로.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에서 영화가 끝나버리는데, 전혀 허무하다거나 화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의 재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기분이 된다.

 어쨌거나, 영화에서 ‘난사’는 결국 이루어진다. 그것이 당신이 기대한 방식이든, 그렇지 않든. 자, 이제 당신의 눈으로 난사의 현장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부천으로 서둘러 달려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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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가네 난사사건 Japan : 2007 : 112min : 35mm : Color




 치열한 예매경쟁을 뚫지 못하고 별 생각이 없었던 영화를 보게 될 경우가 있다. 사전 정보도 없이 보기 시작한 영화가 뜻밖으로 마음에 들 때의 쾌감은 대단하다. 길을 걷다 오천 원짜리 지폐를 주었을 때의 기분 정도?(왜 오천 원인지는 비~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영화는 보통 훌륭하지 않을 경우가 많다.

 묶어놓은 기준을 짐작할 수 없는 단편들의 묶음 “부천 초이스 : 단편 2”의 경우는 어느 쪽이었느냐 하면, ‘대체로 나쁘지 않다’ 정도. 하나하나 간단히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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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외로운 별> Korea : 2006 : 10min : Digi-beta : Color : 한병아
 엔딩 크래딧이 애니메이션 자체보다 볼 가치가 있다. 감독은 그냥 한 번 애니매이션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엔딩 크레딧엔 감독의 이름이 가득하다. 많은 이를 혹하려면 차라리 싸구려 아포리즘이라도 채워 넣었으면 됐을 텐데, 그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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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드워드 제임스의 기억> Canada : 2006 : 15min : Beta : Color : 로드리고 구디뇨
 최면 치료를 받는 남자의 시각을 카메라로 대체하여 기억을 추적하는 영화. 시작하고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결말을 알 수 있는 단편이다. 그 단점을 감춰보려는 의도였을까, 마지막에는 ‘그게 아냐!’라는 식의 꼬리를 붙이는 비겁함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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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매듭> Italy : 2006 : 33min : Beta : Color : 파비오 레시나로 & 파비오 구아글리오네
 과학이 신체에서 영혼의 물리적 근거를 발견한 근미래. 인류는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게 된다, 라는 전제로 시작하는 영화. 세계관이 마음에 들뿐더러, 영상과 음악도 빼어나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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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탈 느와르> France : 2006 : 15min : Beta : Color : 프랑수아 쟈맹
 단편답게 간결한 사건을 가지고 ‘르와르’ 장르를 패러디한다. 여자의 목을 삽으로 찍어 죽이는 장면에서는 의외로 공포에 질렸달까, 그런 반응의 관객들이 많았다. “오랫동안 친구가 되겠군”(이었던가?)이라는 마지막 대사에서는 이 영화의 성격을 확실히 이해하고 키득키득 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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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터와 로봇아빠> Spain : 2006 : 9min : Beta : B&W : 카를로스 탈라망카
 흑백필름. 예스러운 조명. 문장으로 치자면 의고체의 영화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이런저런 부품들을 모아 로봇 아빠를 만든다. 로봇이 완성되어 기침하듯 연기를 뱉어내며 아들과 걷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여객기가 무언가를 조롱하듯 날아간다. 은근히 웃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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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헬리 India : 2005 : 140mim : 35mm : Color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비가 내린다.


 설화는 역사적으로는 '전승'되며 지역적으로는 '전파'된다.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설화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더 널리 퍼지게 된다. 한편 이야기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기원하기 때문에 어떤 화소들은 여러 곳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에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여전히 이야기되고 있다.

 인도영화 "파헬리"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옹고집전에 지귀설화를 섞어놓은 정도의 영화이다. 나무의 정령이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집을 비운 그녀의 남편 형상을 하고 그녀와 사랑을 하게 된다는 간단한 뼈대의 이야기를 두 시간 20분으로 늘여놓았다. 인도영화이니만큼 흥겨운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않고 삽입되어 지루하다는 느낌은 없다.

 재미있는 것은 해설자 역할을 하는 꼭두각시 인형들이다. 왕과 왕비의 모습을 한 인형들은 판소리의 고수처럼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고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하며, 현자와 같은 충고를 하기도 한다. 조금 허술한 점은, 처음엔 이야기의 내부에 있던 인형들이 나중에는 이야기의 외부에서 논평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어쨌든 꼭두각시 인형들 덕에 영화는 민담의 특성을 획득한다. 할머니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흥미 본위의 옛날 이야기 같은 느낌 말이다.
 
 영화는 조금 황당하게 끝을 맺는데 골치 아픈 것은 잊어버리고, 민담을 듣는 것처럼 즐기고 마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영화에서 결말의 윤리성을 따지는 것은 성경을 읽으며 "에이, 말도 안돼"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 일단 표를 손에 넣었다면, 그들의 춤과 노래를 마음껏 즐겨라. 단, 옆 사람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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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속으로 Korea : 2007 : 104m : 35mm : Color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이야기를 ‘믿을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판타지에서 이 원칙은 더욱 중요하다. 듣는 내내 ‘이건 좀 비현실적인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이야기는 판타지로서 실격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판타지 호러 멜로’(?)를 표방하고 있는 황규덕 감독의 영화 “별빛 속으로”는 판타지물로서의 미덕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머릿속에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을 설정해보라. 그 선을 나비가 넘나들고, 선은 무화된다. “이 영화는 판타지이다”라는 선언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죽음과 삶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40대 교수인 수영은 꿈속에서 뛰쳐나온 듯한 나비에 이끌려 들어간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배경은 70년대 말. 수영의 첫사랑이랄 수 있는 ‘삐삐소녀(김민선 분)’의 투신자살 이후 그를 둘러싼 판타지가 시작된다. 암울한 시대상이 어쩌니 하며 이 영화를 설명하는 호사가들의 말은 믿지 말라. 이 영화의 시대배경은 신비의 인물 ‘삐삐소녀’와 주인공 수영을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될 뿐이다. “별빛 속으로”가 목적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어떤 이미지로부터 그 시대를 구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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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게'를 부르며 전단을 뿌리던 삐삐소녀는 투신자살을 한다.


 불만인 것은 목덜미가 후끈 달아오를 정도의 민망한 반전이다. 계획된 반전이긴 하지만, 그 앞까지의 이야기가 반전을 향해 달려왔다기보다는 반전을 엉성하게 덧붙인 느낌이다. 반전에 대한 강박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가 ‘판타지 멜로’물이라는 정보쯤은 미리 알고 있었으니만큼, 기대했던 것은 서사의 개연성이 아니다. 다만 좀 더 그럴싸하게 ‘뻥을 치는’ 솜씨가 아쉬웠다. 거짓말이 너무 투박하여 마치 조밥을 먹는 것처럼 껄끄럽다. 판타지 몇 편을 더 찍고 싶다는 감독의 다음 작품은 ‘목 넘김이 부드러운’(?) 영화이길 바란다.